1. 개요[편집]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1]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그날이 오면〉[2]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 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광복절 노래>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동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며, 무전으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 일에 걱정이었다.
- 백범 김구가 일본의 항복 당시 상황을 술회하며
대한 독립 만세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현재의 NHK) 라디오로 항복선언을 하여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일제 통치에서 해방된 것. 이 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광복절로 지정되었으며, 북한에서도 해방절이라 하여 이날을 기리고 있다.
웃긴 건 일본에서는 이날을 덴노가 전쟁으로 고생하는 자국민을 불쌍히 여겨 종전을 선언했다고 해서 종전기념일이라고 기리고 있다. 절대로 패전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정신승리 일본이 그렇지 뭐 덤으로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며, 실제로는 덴노가 서명한 것이 아니라, 덴노 및 일본국 정부의 명에 따라, 그리고 대본영의 명에 따라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의 날짜와 같아서 보수층 등에서는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기도 하나, 1948년 이전 한국사와 단절성을 띤다는 점[3][4], 북한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려는 주장이 배어 있는 듯하다는 점, 그리고 건국일을 광복절에 맞춘 점 등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5] 애초에 48년의 정부 수립 자체가 45년 8.15광복의 3주년 날짜로 맞춘걸 생각하면, 이 날이 얼마나 의미있게 쓰여졌는지는 분명하다.
2. 8월 15일[편집]
그 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5개 조항[6]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하였다.
그날 정오에 히로히토 덴노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방송 부분에 대해서는 옥음방송 참고. 당일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히로히토 덴노의 항복방송을 들은 군중들이 그날 바로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항복 선언 순간 바로 그러한 모습이 조성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덴노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난해한 한자어가 섞여 있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이게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문어체(文語體)로 나왔기 때문에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2차대전 이전까지의 일본에서는 덴노의 조서, 칙명 등등 온갖 공문서에 문어체가 사용되었고, 항복 발표 방송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긴 했어도 여하튼 알아들을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극소수였다.
해방이 되었다고는 해도 일본군의 압력과 감시가 하루만에 풀릴리는 없어, 8월 15일 당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게다가 해방 소식이 퍼져도 언론 통제로 계속 일본군이 연승한다는 소식만 듣고 있던 조선에서는 뜬금없이 일본의 패망이라는 사실 자체가 전혀 기존의 보도와 맞지 않는 헛소문처럼 들리기도 했다고 하며, 워낙 긴 일제강점기를 겪은 조선에서는 '해방'이라는 관념 자체가 잘 와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35년이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을수도 있는데, 그게 아닌것이 당시 36세 밑으로는 모두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는 얘기고 당시의 인구구조를 보면 굉장히 높은 비중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35년을 거치고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지 20년이 넘게 지난 상황이었다. 당시 최고 지식인 중 하나였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마저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노인들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청년층 아래로는 생전 처음 태극기를 보는 상황이었다고. 군중들이 환호하는 사진의 태극기 중엔 태극이나 사괘의 배치 등이 틀린 깃발도 발견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일장기의 모양이 덧칠해 태극기를 만들기 사실 적절했기 때문에(…) 급하게일장기를 커스터마이즈하여 아래쪽을 먹칠하고 사괘를 그려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장기 처분의 적절한 예 다만 실물은 많이 전하지 않아서, 떡밥에만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강준만 같은 경우는 방송 직후 바로 조선 민중들이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오후부터 서서히 서대문형무소의 죄수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이 퍼져 나가면서 경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타 증언들도 당시 정오에는 조용했지만 반복된 라디오 방송과 일본인들의 이상한 분위기, 행정의 공백(배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는 입소문 등으로 당일 오후와 밤 동안 도시 지역에는 광복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는 이 부분이 은근히 고증이 잘되어 있다. 8월 15일 해방 당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가만히 있다가 그 다음날부터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8.15 당시 광화문 사거리의 모습이라고 하나 정확한 출처는 없다. 출처. 이후의 사진일 가능성도 있으니 확인 바람.
3. 8월 16일[편집]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7] 그 때서야 경성(서울)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덴노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파도처럼 휘몰아쳤던 광복의 기쁨. 위에서부터 서울, 전남 광주, 전남 광양이다. 출처.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달라고 요구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하는 연설을 한다.
(연설을 하기 위해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향하는 여운형과 그를 따르는 군중들의 모습)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정무총감을 말한다)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연설은 중간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나면서 군중들이 서울역으로 몰려가면서 중단되었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선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전향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곧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8]을 발표하였다.
(YMCA건물의 건준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은 며칠간 전국에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며칠간 해방을 환호하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아쉽게도 위에서 나왔듯이 당시 사람들은 태극기의 모양을 잘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태극기는 얼마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여기에는 태극기의 형태가 정리되지 못한 채 일제강점기를 맞은 탓도 있긴 하지만…
4. 당시 상황[편집]
해방 소식을 듣자 반일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선전물을 뿌렸다.
재 조선 일본인들은 황급히 재산을 팔아 치우고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그러려고 노력 하였다. 몇몇 조선 출생 일본인들이나 처분할 재산이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땅을 고향으로 생각했기에 일본으로 돌아가는걸 오히려 꺼려했다고도 한다. 치안이 유지되었으나 일본인들이나 친일 조선인들에 대한 보복공격도 있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이북에서 좀 더 많았다고 한다. 역으로 치안을 유지한답시고 일본 경찰이나 군인이 총격을 가해 조선인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에 당시 상황이 소상히 나왔다.
한편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 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어주기로 되어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 결국 행정권 등은 미군정에 이양되었다.
경성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일본육군성직속 비밀 테러단이 연합군 요인들을 암살하려다가 적발되어서 감옥에 갔다. #
5. 기타[편집]
부산광역시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집중거주지역은 변천정(弁天町, 벤텐초), 금평정(琴平町, 코토히라초) 일대였는데 매우 일본스러운 지명이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광복을 기념해 동네 이름을 '광복동(光復洞)'으로 바꾸었다.[9] 현지인들은 흔히들 남포동이라고 부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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