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오늘은 ‘기독교의 전통 신관, 이대로 좋은지’ 교우님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신 하나님에 대해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들이 여전히 강조하는 ‘배타적 유일신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의식을 넓혀가야 좋을지 솔직한 생각을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먼저 제가 처음 기독교를 접했을 때의 경험을 잠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35년 전에 ‘저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저의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즉 ‘존재하시는 그대로’ 만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신적 존재를 만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나고 체험한 신은 ‘그 사람이 주관적으로 인식한 신’일 수밖에 없으며, 그 체험되고 인식된 신은 사람마다, 또한 종교전통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만난 하나님 역시 ‘절대객관의 하나님’이 아니라 제가 인식한 ‘저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인식한 저의 하나님만이 옳고 다른 분들이 만나거나 인식한 하나님은 틀리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하나님을 교우님께 소개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님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가듯이, 저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생각이 많이 달라졌는데, 그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교우님들의 신앙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무신론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으로 철학을 전공했던 저는 종교의 세계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당시 만났던 예수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을 통해 만났던 따뜻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저의 첫 인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막 입문한 기독교 초년생으로서 신앙동아리를 통해 배운 기독교 교리가 너무나 배타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종교철학>이나 <인도철학> 등 철학과 수업을 통해 접한 이웃종교는 의외로 너그러웠습니다.
당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손에 잡은 꾸란(보통 ‘코란’이라고 발음하지만 ‘꾸란’이 원음에 가깝고 무슬림도 그렇게 부르기를 원하므로 ‘꾸란’으로 통일하겠습니다.) 해설서에서 “너희의 종교는 진실로 하나이니라.”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당혹감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속했던 신앙공동체는 이슬람을 사교로 배척했지만, 꾸란은 우리 기독교인을 경계하면서도 ‘경전의 백성’으로, 즉 형제종교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 담긴 내용이 우리 기독교 성서보다 상대적으로 너그럽다고 느꼈을 때의 혼란과 두려움은 당시 기독교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근본주의에서 시작한 대학시절의 저의 신앙은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포용주의로,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로는 다원주의로 이동하였고, 이후 한국 교회가 우상으로 치부하는 이웃종교들이 기독교 못지않은 영적 매력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걸 확인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