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 마태복음서 13:55-56
우리 모두 한 때는 아기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젖먹이 아기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다고,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이 성육신했다고 하지만, 아기 예수에게는 아직 남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엄마 마리아의 젖을 먹고 돌봄을 받지 않으면 단 며칠도 살 수 없었을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그로부터 삼십 여 년 뒤,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는 선생인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고백합니다 (마태 16:16).
그렇다면 예수는 언제부터, 몇 살 부터 메시아였을까요?
요한복음서는 창조 이전부터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계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앙적 진실’이지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역사적 예수의 삶을 보면 최소한 아기 때나 소년 시절에는 메시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메시아성이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다면 복음서에는 그런 설화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는 아예 예수의 탄생과 유년시절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는 예수의 탄생설화가 있지만, 역시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이집트로 피했다가 돌아온 이야기, 열 두 살 때 부모와 떨어져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복음서는 왜 예수의 어린 시절을 언급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는 평범한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고향인 나자렛에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예수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메시아였다면 그들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는 자기들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평범한 예수가 그렇게 비범한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줍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 사람들이 웅성거립니다.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예수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나자렛 사람들도 메시아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심지어 친척과 가족들도, 자기들이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 온 바로 그 평범한 예수가 비범한 메시아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의 이런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이 메시아 사건, 그리스도 사건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임을 말해줍니다. 베들레헴에서 그 이름처럼 평범한 아기 '예수'가 태어났고, 그 예수 안의 그리스도가 꾸준히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러 광야에서의 하느님 체험을 통해 예수 안의 그리스도가 비범하게, 놀랍게, 완전하게,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비우고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과 하나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실현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이 완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완전하라고 합니다(마태 5:48).
우리도 그리스도를 실현하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라고 합니다.
17세기 독일의 신비가 앙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천 번을 태어나더라도 우리 안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질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부족하고 약하고 심지어 악하기까지 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할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경한 바람인 것만 같습니다. 게다가 예수가 날 때부터, 아니 태초 이전부터 완전하신 그리스도였다는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리는 우리의 인간성 대한 희망보다 회의를 더 많이 갖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비범한 스승 예수도 한때는—아니 그의 인생의 대부분 동안—우리처럼 연약하고, 무력하고, 동요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예수의 평범성과 비범성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에게도 비범한 그리스도의 가능성이 있음을 믿게 해 줍니다. 그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삶입니다.
마침 오늘 12월22일은 절기상으로 동지입니다.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동지는 어둠이 가장 길고 깊은 날이기에, 바로 이 날로부터 빛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동지처럼 어두워도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능성은 빛을 잃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 안의 어둠이 가장 깊을 때 그리스도의 빛이 비로소 밝게 보이고 빛나기 시작합니다.
성탄이 기쁜 소식인 것은, 예수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나 자란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그리스도가 태어나 자랄 수 있음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낡은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변화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그것이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탄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가능성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은, 예수가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 각자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성탄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종합선물세트’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