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이민목회이야기(7) "양보하며 더 보듬어 주는 목회 소망" 한명수 목사 (해밀턴 장로교회 담임)
아주 오래 전 이웃교회 청년들과 목회자가 선수로 참석해야 하는 농구시합을 한 적이 있다. 적지 않은 인원이 모인 교회의 목회시절 난 승부욕과 자신감이 넘쳐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청년들은 상대팀이 득점하면 연신 박수를 치며 잘했다고 했고 상대 청년들도 같았다. 공을 보면 좀 악착같이 달려들지 않고 여유 있게 쉬엄쉬엄 경기를 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대를 다녀 오지 않았고, 뉴질랜드 생활에 익숙해져서 승부근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들이 앞으로 험한 세상을 어떻게 해쳐갈까?"하는 맘을 먹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목사님, 즐기세요!"하며 씽끗 웃고 지나가지 않는가.
자기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로 인해 상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교회간의 경쟁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 밖에선 친구와 선후배로 친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그들의 형편을 생각하니 그들의 행동이 이해하게 됐고 시간이 가면서 내 맘에 그 청년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기억에서 살아있다.
그 후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 상황과 주변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골프와 낚시가 대세였던 교민들의 여가 활동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이웃교회와 족구 경기를 하게 됐다. 정기적으로 운동을 했던 그들에 비해 우리 팀은 인원과 기량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우린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해야 했고 팀워크를 한 번 밖에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지더라도 품위를 유지하겠다고 생각이지만 응원 나온 여자 교우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우리 팀이 완승을 했다. 또 경기를 보고 있던 족구 동아리 팀도 우리에게 경기를 제의해 왔는데 마치 독일 전차군단을 무명의 축구팀이 격침시키듯 그들에게도 승리했다.
누가 봐도 상대팀들은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비해 우리에겐 한 명의 탁월한 공격수가 있었다. 전략은 그 한 사람만 공격을 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수비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선수들은 온 몸을 던져 수비했고 공격을 잘 할 수 있도록 공을 전달하는데 집중했다. 반면 상대팀들은 여러 스트라이커들이 있어서 이곳 저곳에서 공격을 했지만 실수가 더 많이 나왔다. 우연이고 농담이지만 그 이후 해밀턴에선 사회체육 클럽 하나가 시들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은 경험이긴 하지만 인원이 많고 기량이 꼭 앞선다고 좋은 결과를 이루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힘을 모은다면 못 이룰 일도 없는 것이 비단 운동경기만은 아닐 것이다. 지려고 경기를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반대로 꼭 이기기 위해서 시합을 하지는 않지 않는가? 때론 실수도 있고, 포지션을 바꿔가며 공격도 해보고 수비도 하며 기량도 발휘하는 기쁨도 얻을 것이다. 팀워크를 맞추며 마음을 모을 수 있고 상대팀과 경기를 통해 땀 흘리며 부대낄 수 있는 유익이 스포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좋은 점 아닌가?
"본질에는 일치를, 비 본질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일엔 사랑을"이란 말은 오래 전부터 기독교 신앙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말이다. 기량이 모자라서 경기에 패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데 있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목회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운동이 주는 기쁨이 있듯이, 목회도 본질을 이해하고 지혜를 모으면 더 풍성한 열매를 얻을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잃어버리고 불필요한 경쟁심과 열등감으론 어떤 유익도 없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는가?
목사와 교인들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아름다운 동반자다. 그러나 현실이 꼭 그렇지는 않지 않는가? 만약 자기주장과 경험만을 내세우면 부딪칠 수밖에 없고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갈등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잊은 채 '왜 나와 같지 않을까"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고 문제의 본질에서 멀어짐에서 시작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좀 더 양보하고 나와 다름의 문제를 더 귀 기울여 서로 들어줬다면 결과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허물에 눈감아 주고 감싸줬다면 어땠을까? 불필요한 자존심과 높아진 벽에 갇혀있을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 이길 수 있음에도 져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 목회에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다윗은 사울의 끊임없는 살해위협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광야로 동굴로 피해 다니는 도망자 신세였다. 그는 두 번 무방비로 노출된 사울을 처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멀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힘을 감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로마 군인들에 대항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검을 쓰는 사람은 모두 검으로 망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당장에 열 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보내실 수 있다"(마태복음 26:52-53)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저항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비본질적인 일에 저줄 수 있는 여유, 눈감아 줄 수 있는 아량이 적었다. 눈 한번 감고, 하고픈 말 꾹 참으면 그 다음이 수월해감을 배워가고 있다. 김재준 목사는 "바로 살려는 노력"을 좌우명으로 삼으셨고, 삶의 지침 첫 번째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이다. 그 어른은 해야 할 말은 하셨던 행동하는 신앙의 선각자셨지만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말을 줄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연합하고 관대해지는 목회자로 변화되고 싶다. 내 삶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이다. 최선을 다하되 경쟁적인 승부욕을 버리고 결과를 주님께 맡기며 더 보듬어 주는 목회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