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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이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by hamdavid posted Sep 0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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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jpg     크리스천라이프 이민목회이야기(9) “관계를 이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한명수 목사(해밀턴장로교회 담임)

 비행기가 오고 가는 공항 대합실은 격정의 감격과 슬픔의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기약할 수 없는 만남과 오랜 기다림 후의 재회엔 여러 사연이 있을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어디에나 있는 일이지만 이민목회는 이런 일들이 더 반복적으로 찾아온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좋은 추억으로만 남을 순 없다. 외국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들이 처음 내게 한 약속대로라면 우리 교회는 아마도 건물도 갖췄을 것이고, 믿음직스러운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눌 수 있음이 기쁨이었는데 점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돕고 섬기는 것이 내 역할임은 잊진 않지만 내게도 위로와 보호가 필요함을 느낀다.


 제자훈련의 개척자로 존경 받았던 어느 원로 목사는 후임자에게 “우리가 지금 한 배를 타고 있는가?”라면서 아들같이 여겼을 후임 목사의 목회에 안타까운 마음을 편지로 남겼다고 한다. 삶은 관계의 연속이지만 관계만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성경의 가르침이지만 ‘관계’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사람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토록 가깝게 교제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관계가 단절돼서 아파하는 것을 보고 내 자신도 경험하면서 근본적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형제인가?”라는 물음이 진부하고 순진한 나의 기대 섞인 생각인가?  


 성경은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도 없고, 마음은 부패함을 간직한 존재”라고 한다. 그런 인간에 대해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 말을 적용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희망”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변화될 수 있을까?”하는 가능성에 회의감이 든다. 내가 어린시절 다닌 교회는 사랑으로 품어주신 분들이 있었다. 함께 해줄 뿐 아니라, 자기의 호주머니를 털어줬다. 물론 인간적인 모습들도 있었지만 마음만은 순수했다. 교회라는 울타리를 통해 마을의 중심 역할을 선도했다. 실수도 있었지만 교회는 용납과 기회가 주어졌고 여기서 얻어진 경험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됐다. 철이 들고 나이가 들어선지 어린 시절 교회 생활이 그립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심리적 부담이 컸고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교우들이 소소한 일들은 챙겨줬다. 이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챙겨줘야 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맘은 더 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몸을 이룬 공동첸데 꼭 목회자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젠 “잘되면 교우들 덕분이고, 그 반대는 리더그룹 일부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목사의 책임의 중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누구만을 의존해서 될 일이 아니다. 각자의 의지와 결단으로 신앙의 자생력을 키워야 하는 개인적 책임은 피할 수 없다고 본다.


 지역교회 목회자 모임에 참석해보면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은 이민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목사는 부인과 함께 교회 일을 하다 사임 압력을 받은 어려움을 나눴고, 눈물 글썽이며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분은 교인들로부터 십여 차례 고소 고발을 당했다며 서로 위로한 적이 있었다. 키위교회 홈 그룹에 참석했을 때 그들의 대화와 기도 제목은 목회자에 대한 불만과 교회를 염려하는 내용이 자주 나왔었다. 내가 무엇이 문젠지 물었더니 “목회자의 메시지가 성경적이지 않고, 메시지에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영어예배에 참석했고, 우리 교회에서도 그의 간증을 들었던 목사다. 내가 이해한 그의 설교는 비성경이지도, 가볍지도 않았음은 내가 목사라 팔이 안으로 굽어서일까?


 다윗에겐 여러 아들이 있었고 형제간에 보이지 않는 왕권 쟁탈의 암투는 있었을 것이다. 암논이란 큰 아들이 배다른 여동생을 성추행 했고, 이후 헌신짝처럼 외면한 일이 있었다. 압살롬은 자신의 친동생에게 패륜적 잘못을 저지른 형에 대해 아버지 다윗은 아무런 징계가 없음에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압살롬은 치밀히 복수를 준비한 끝에 형을 죽이고 오랜 기간 아버지를 피해있었다. 그는 외모가 수려한 매력 있고 정의감이 있는 왕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윗은 오랜 그리움의 시간 속에 아들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오도록 했지만 지척에 있으면서도 아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팠을 아들에 대한 그리운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거절당했고,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자책감을 넘어 압살롬은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반역을 시도한다. 아들의 반란으로 치욕적인 피난을 떠나며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는 절망을 다윗은 맞았다.  큰 아들의 잘못을 훈육하고, 정당하진 않지만 반인륜적 행동에 혈기 있게 대응한 압살롬의 행동을 지적하고 손 내밀었다면 그토록 아들의 죽음 앞에 목 놓아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버드 경영대학 존 커터 교수는 기업에서 “변화를 선도해야 할 중심적 그룹이 필요하며, 이들에겐 신뢰와 공동 목표가 팀워크의 생명이다”고 했다. 믿음의 공동체엔 변화와 신뢰를 줄 수 있고, 얽힌 관계를 풀어주고 이어줄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단절된 관계를 이어줄 능력에 한계가 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뿐일세”라는 찬송처럼 사랑에 목말라하며 관계의 단절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이어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존재임을 깨달았다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할 일도 없고, 이해하지 못할 일도 없는데 현실은 쉽지 않다. 한 배를 타고 있는 나그네들이 이웃을 배려하는 것은 어떤 은사보다 앞설 수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관계를 잇는 첫 걸음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말씀과 복음 앞에 내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 이웃도 함께 해야 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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