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 물음표 ? 느낌표 !

by 나누리 posted Aug 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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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은 고민이나 주체적 사색, 깊은 가슴앓이 통해 성숙하는 것 ~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신앙고백은 본질적으로 사랑 고백이다.
그런데 사랑 고백은 무미건조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다분히 감상적·서정적 진술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당신의 눈 속에는 초롱초롱 빛나는 별이 있고 맑은 호수가 들어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의 작은 눈 속에 별이 있고 호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비유적인 진술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감동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나는 예수가 하느님이라고 믿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한 시대를 살았던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 복잡하게 설명하듯 "예수는 본질과 위격에 있어서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식으로 추상적인 용어로 아리송하게 이해하기보다는,

 

"나는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내 마음에 큰 감동과 충격을 주는 깊고 중요한 의미를 발견한다.
예수를 생각하면 내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수라는 존재는 참으로 놀랍다 !
나는 그분의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내게 하느님과 같다"

 

는 식으로 쉽게 풀어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또 그래야 예수의 의미가 내 삶에 더 생생하고 절실하게 다가온다.

느낌표 !  이건 대단한 거다.
느낌표가 없으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다.
과학적으로 말하더라도, 인간이 몸담아 살고 있는 가없는 우주와 이 세상에는 온갖 신비로 가득하다. 어쩌면 종교의 기원과 믿음의 시초는 그 신비로움에 대한 전율과 감동과 환희였을지도 모른다.

첨단 과학이 발달한 요즘 시대에도 해맑은 동심(童心)을 가진 어린아이들은 주변 사물들에 대해 수없이 물음표를 던지고 느낌표를 달 줄 알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종교적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 소중한 느낌표를 잃어버리고, 그 결과 겉으로 제아무리 종교적인 체해도 실제로는 종교의 핵심에서 멀어진다.

윌리엄 워즈워드는 바로 이 점을 간파하고서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일침을 놓았던 게 아닐까.

지금까지 내 신앙생활 대부분의 시기는 자의든 타의든 거의 마침표 수준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별다른 고민이나 주체적 사색, 깊은 가슴앓이 없이 소위 '기독교 신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럭저럭 살아왔다.
나뿐만이 아니다. 내 주변 신자들을 보면 대다수가 획일적·평균적 수준의 신앙에 그런 대로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게 오늘날 이 땅의 기독교가 참된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초래한 근본 원인들 중 하나가 아닌가.

물음표가 없으니 신앙의 깊이가 없고, 느낌표가 없으니 신앙의 감격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한다지만 그 사랑이 천박하고 메말랐다.
입술만의 사랑이지, 가슴 절절한 진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저 습관적인 사랑, 어쩌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사랑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앞으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믿어 왔던 전통 신앙에 하루 한두 번 툭툭 물음표를 던져 보고 또 가슴 찡한 느낌표도 이따금 달아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이것이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내 신앙이 살아나고, 그래서 또 내 삶이 새롭게 살아나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무지개 >

하늘에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윌리엄 워즈워드·영국 시인, 1770~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