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유린의 주구(走狗)를 어찌할 것인가 ?
우리사회연구소 이승만을 위한 정치 공작대, 특무대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비호아래 미국의 정보기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를 본 따 1950년, 육군 특무대 CIC를 창설했다. 특무대는 군대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치 공작에 적극 나서 헌정을 유린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특무대에서 가장 악질적인 인물은 4대 특무부대장을 지낸 김창룡이다. 김창룡은 일제 강점기 북만주에서 일본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시킨 악질 친일장교이자 반민족행위자였다. 김창룡은 해방 이후 월남하여 군대에 들어가 정보계통에서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1951년 5월 15일 특무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연장을 위해 앞장섰다. 이승만 권력 독재를 위해 김창룡이 특무대를 동원하여 헌정을 유린한 행위로는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을 들 수 있다.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은 1952년 전쟁 당시 피난 수도였던 부산 근교에서 대구형무소의 중형수들을 무장공비로 조작해 공포분위기를 조장하고, 이를 빌미로 이승만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했던 사건이었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이용하여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권력독점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 이승만과 악수하고 있는 김창룡 @나라기록포털 한국전쟁 후에도 특무대의 정치개입은 이어졌다. 1956년 진보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 선생에 대해 1958년 자행된 사법살인 행위에도 특무대가 개입하였다. 조봉암 선생은 1956년 대선에 “평화통일”을 주요공약으로 출마하여 200만 표를 득표함으로써 약 30%의 지지를 얻어 이승만 정권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 선생을 간첩으로 몰아 살해했을 당시, 간첩 혐의의 핵심은 간첩으로 알려진 ‘양명산’이 북한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조봉암 선생에게 전달했다고 자백한 진술에 있었다. 양명산은 2심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진술을 했다고 양심선언을 하였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양명산과 조봉암선생을 사형시키는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육군 특무대는 이 과정에서 양명산을 간첩으로 적발하고, 허위진술을 강요했다.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추악한 사법살인행위에 특무대가 깊숙이 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중앙정보부 창립 멤버 중 한명이었던 조웅 목사는 2003년 2월자 <민족21>과의 인터뷰에서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섰다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한 신익희와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직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설 예정이었던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에 CIC 방첩대 즉 특무대가 개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일당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한 직후, 정보부 장교 출신 김종필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창출과 연장에 앞장섰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장 안병욱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1966년, “1967년 선거는 기필코 승리함으로써 5·16혁명의 결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여야 할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므로 집권세력으로서의 수세(취약점)를 합법적 범위내에서 장기적이고 치밀한 기획과 준비태세로서 극복한다”고 하여 겉으로는 합법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온갖 불법을 동원하여 박정희 독재 정권을 유지하는데 앞장섰다. 중앙정보부의 이런 모습은 지난 4월 공개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정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과 정부 정책의 진의를 적극 홍보해야 한다”,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한다”며 “야당이 되지않는 소리하면 강에 처박아야 한다” 등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행태였다. 중앙정보부는 한국의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뒤엎는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기 위해 ‘풍년사업’을 자행했다. ‘풍년사업’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를 당선시키고 이후 유신헌법을 만들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꾀한다는 내용의 정치 공작이었다. 중앙정보부는 ‘풍년사업’에 따라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2007년 10월 24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의 선거 유세에 인파가 몰린 것이 부각되지 않도록 보도통제를 실시하고, 요원들이 직접 경상도에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유인물을 뿌렸다고 한다. 또한 이 사업의 일환으로 중앙정보부 요원이 재일동포를 찾아가 국제전화로 한국의 친척들에게 김대중을 찍지 말라고 공작한 내용도 있다고 한다. 또한 1971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을 했던 신민당의 최형우는 자신의 책에서 “내가 살고 있던 우정동의 경우 ... 친척들과 친구들의 것을 합치면 100표가 훨씬 넘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 7표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고 밝혀 개표부정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유신헌법 작성에도 적극 개입했다. 한홍구 교수가 2012년 2월 24일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유신헌법의 초안은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 부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5명의 비밀공작팀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1972년 5월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과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헌법의 골격을 짜기 시작했고, 박정희는 거의 매주 이후락 등과 함께 이를 검토했다고 한다. 유신 이후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해외에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하기로 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결성을 위해 노력했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이 제거되면 반유신 운동이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본에 있는 김대중을 납치, 살해하려고 했다. 한홍구 교수의 2012년 6월 1일자 <한겨레> 글에 따르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해외담당 차장보 이철희를 불러 김대중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지시했다. 1973년 8월, 중앙정보부는 일본파견관 전원을 동원하여 김대중을 납치하는 공작을 실행했다. 북풍 공작, 국가안전기획부 1981년 중앙정보부를 해체하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안기부의 헌정유린 행위는 달라지지 않았다. 국정원 진실위 안병욱 위원장에 따르면 안기부 부장이었던 장세동은 1986년 안기부 창설기념일 치사에서 “대통령각하의 통치권 강화에 우리의 모든 역량을 집주(集注)해야만 한다”면서 “대통령각하의 분신기관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1987년 12월, 박정희의 유신체제 이후 15년 만에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는 선거에서 안기부가 선거개입으로 또다시 헌정을 유린했다. 2007년 <CNB뉴스> 47호와 <한국일보>에 따르면 1987년 대선에서 안기부는 선거대책반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안기부 직원들이 야권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뿌리거나 각종 시국강연에 참석해 노태우 후보를 지원을 요구하거나 선거운동에 나섰다. 안기부의 이런 정치공작은 ‘상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87년 대선에서는 ‘상록사업’뿐 아니라 ‘무지개공작’까지 진행되었다. ‘무지개공작’은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승객을 태운 KAL858기가 미얀마 해상에서 실종된 사건을 안기부가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던 공작이다. 2007년 4월 4일자 <통일뉴스>에는 안기부가 작성한 ‘무지개공작’문건의 일부가 공개되었다. 문건에 따르면 무지개공작은 <1.목적>에서 KAL858기 실종사건을 “북괴의 테러공작”임을 폭로하여 “북괴를 위축시키고” 이를 이용하여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과 안보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한 대선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것이라고 밝혀 안기부가 KAL858기 사건을 대선에 적극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 있다. 안기부는 사고가 난지 불과 3일 만인 12월 2일에 작성된 문서에서 사고의 원인을 ‘미얀마 상공에서 폭파’, ‘북괴의 테러공작’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부실하다고 비판받은 현지조사단이 12월 9일 현지조사를 마치기도 전이었다.
▲ '무지개공작' 문서 일부 @통일뉴스 뿐만 아니라 ‘무지개공작’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공개할 것인지에 대해 계획을 세웠는데, 12월 5일 외무부 장관 명의로 “북괴가 사건 배후에 게재 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조사진행사항 중간 발표를 진행하고 이를 국내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도록 유도한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대선투표 날이었던 12월 16일 이전에 수사 중간결과를 발표할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범인이라고 알려진 김현희는 대선투표일 전날 전격 한국으로 압송되어 투표날 모든 신문을 장식하기도 했다. 안기부가 ‘무지개공작’을 추진하면서 외무부 장관까지 동원한 모습은 마치 이번 18대 대선에서 12월 16일 오후 11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주도하여 수서경찰서장이 소위 국정원녀의 정치관련 댓글을 찾지 못했다는 내용의 수사 중간발표를 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안기부의 북풍공작은 1987년에만 그치지 않았다. 1997년 대선에서 안기부는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북풍’을 동원했다. 2013년 6월 17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안기부는 1997년 대선 몇 주 전에 재미교포 윤홍준씨에게 공작금을 주고 12월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후보가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내용을 유포하도록 사주했다. 그리고 안기부는 월북한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씨가 김대중 후보 앞으로 보낸 편지를 입수하여 이를 이용한 언론공작을 통해 김대중 후보에게 친북 이미지를 뒤집어 씌웠다. 여기에다 안기부의 방조 아래 당시 청와대 행정관 등이 북측 인사를 만나 휴전선의 긴장 조성을 위해 판문점 총격 사건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한 ‘총풍’ 사건까지 있었다. 대통령도 안중에 없는 무소불위, 국가정보원 1997년 12월,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 의해 목숨까지 잃을 뻔한 피해를 입었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정보기관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1월, 안기부를 해체하고 국정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국정원의 선거개입 과정과 NLL 녹취록 문제에서 드러났듯이 국정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장을 지낸 김만복은 국정원에 의해 공개된 2008년 1월자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작성을 지시하거나 보고 받은 적 없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대변인은 7월 5일 <뉴시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대화록을 청와대에 압박을 주거나 보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고 밝혔다가 다음날 국정원에서 이 발언을 부인하기도 했다. 국정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정보수집’의 목적으로 작성했다는 의심을 할 수 있는 정황이다. 이에 민주당의 홍익표의원은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을 보좌한 것이 아니라 사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국정원은 2013년 7월 10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NLL포기 발언이 맞다는 성명을 전격 발표했다. 이것은 국정원이 정치적 사안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해석에 까지 관여한 것으로, 정보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정치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헌정질서 파괴발언이나 다름없다. 헌정유린 국기문란, 국정원을 심판해야 국정원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저지른 광범위한 정치개입 행위와 지금 벌이고 있는 후안무치한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행위는 이번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정원을 비롯한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있어왔던 문제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을 규정한 헌법을 유린하고 온갖 정치공작으로 국민의 권력을 강탈해 정보기관이길 스스로 포기했다. 지금도 국정원은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덮어버리기 위해 또 다른 공작을 시도하고 있다. 국정원의 헌정유린행위가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국정원은 다음에도 서슴지 않고 헌정을 유린할 것이다. 지금 한국은 정보기관의 선거개입에 의해 우리 국민들이 투쟁으로 만들어온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끝장난 상황이다. 민주주의의 복원을 위해 국정원의 헌정유린행위를 처벌하고, 국정원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해체하는 등 국정원을 심판대에 올려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은 국익을 위해 해외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정보기관의 활동이 비공개적인 만큼 정치적 중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시작으로 안기부, 국정원은 정치적 중립과 거리가 먼 채 오로지 정권의 안위를 위해 헌정질서를 유린하는데 앞장섰다.